1980년 5월 21일 새벽, 광주 밖으로 연결되는 전화선이 모두 끊깁니다.
도청 앞 집단 발포 뒤 주요 외곽도로도 모두 차단됩니다.
고립된 광주는 홀로 싸웠습니다.
[최영선/5·18 최후항쟁 시민군 : "같이 나가버리면, 우리가 아무도 없으면 누가 우리를 전해 줄까? 우리가, 광주가 어떻게 되지? 민주주의가 어떻게 되지? 내 삶이 어떻게 되지? 그걸 생각하면서 못 나가게 되는 거죠."]
계엄군의 검열로 국내에서조차 기사가 통제된 때, 외신 보도로 미국에 참상이 알려졌습니다.
[장태한/5·18 당시 미국 UCLA 학생 : "우리가 시위도 하고, 시위를 하는 과정에서 이제 피가 모자라서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그런 뉴스를 저희들이 접했거든요."]
LA 지역 교민 대학생들은 광주로 가서 싸우자며 이른바 '의용군'을 모집했습니다.
[이갑산/5·18 당시 LA지역 한인 대학생 대표 : "저기 다 죽고 있는데 우리도 저쪽 가서 죽었다고 하자. 그러면 광주에 의용군을 한번 보내는 건 어떠냐. 모집을 한번 해보지 뭐. 좋다 모집하자."]
당시 활동했던 기자도 그때를 생생히 기억합니다.
[변홍진/전 미주 한국일보 기자 : "구조대를 보내야 된다고... 의용군은 아니고 '구조대’를 보내고 같이 가서 우리도 시위를 하자. 그래갖고 그때 그 사람들도 모집한다고..."]
신문 광고를 냈고, 학생과 시민 17명이 지원했습니다.
[정성업/전 LA 5·18 기념사업회 회장 : "총영사관에서 아주 절대 막았죠 총영사관. 그때 당시에 시민권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비자 신청을 했는데 안 줬죠."]
LA 총영사관에 관련 기록이 남아있는지 확인했습니다.
[박철/LA 총영사관 영사 : "46년 전 상황이라서 저희 총영사관에서도 어떤 기록이 확인할 수 있는 어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고요."]
하지만 생생한 증언으로 확인된 의용군 조직은 최후 항쟁 시민군도, 5·18 재단도 지금까지 몰랐던 사실입니다.
[윤목현/5·18기념재단 이사장 : "저는 뭐 그동안에 기자 생활도 하고 쭉 해왔습니다마는 정말 생생하고 처음 듣는 얘기라. 아 가슴은 뭉클하지만. 그랬구나 아 우리가 역시 고립되지 않았구나..."]
1980년 오월, 피 흘리는 광주를 위한 LA 교포들의 뜨거운 연대가 46년 만에 주목받고 있습니다.
KBS 뉴스 류성호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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